런던 거리시장 런던의 시장에선, 재래시장에 대한 고정관념을 버려야 한다.
글쓴이 : 바람 날 짜 : 08-03-19 08:58 조회 : 1264
낭만과 젊음과 비즈니스가 어우러진다

2007년 10월 18일 (목) 21:00  한겨레신문
 
 런던 거리시장 런던의 시장에선, 재래시장에 대한 고정관념을 버려야 한다.

영화 〈노팅힐〉에서 줄리아 로버츠와 휴 그랜트가 데이트를 즐기던 그곳은 한적한 교외가 아니라, 런던 시내의 포토벨로시장이다. 폐쇄 직전의 운하 주변거리를 되살린 캄덴락시장은 개성있는 젊은이들을 끌어모으고, ‘유럽의 월스트리트’로 불리는 리버풀스트리트 한복판의 스피탈필즈 시장엔 묻혀있는 ‘보석’을 찾아내려는 대형 업체들의 바이어들로 가득찬다.

■ 도심에서 추억을 판다=지난달 29일, 런던 시내 노팅힐 게이트역부터 약 2㎞ 구간에 걸쳐 있는 포토벨로 시장의 주말은 아침부터 분주해진다. 매주 토요일 이곳 상징과 같은 골동품(안틱) 시장이 열리기 때문이다. 300년 전 청과물 시장으로 시작했지만, 2차대전 이후 새로운 ‘명물’이 더해졌다. 전쟁에서 돌아온 뒤 일자리를 찾지 못하던 퇴역 군인들이 자신들이 세계 각국에서 가져왔던 물건을 내다팔았다. 7년째 이곳에서 골동품을 판다는 레바논 출신 바사우 무자에는 “2차대전 당시 쓰였던 물건들과 망원경이 내 주요상품”이라고 소개했다.

옥내 상점들도 많지만, 포토벨로를 유명하게 만든 건 이렇게 길거리를 따라 즐비한 노점상들이다. 노점을 이곳에서 차리려면, 개인만 구청에서 ‘스트리트 마켓 허가증’을 받은 뒤 요일에 따라 정해진 요금을 내고 장사를 할 수 있다.

이 시장 서쪽은 고소득 전문직들이 사는 홀랜드파크 지역이고, 북쪽은 모로코 이민노동계급들의 거주지이다. 하지만 상인 코스타스 클린터스는 “그들은 모두 포토벨로에서 로맨틱한 분위기를 함께 즐긴다”고 자랑했다.

■ 독창적 상품 있으면 시장으로=런던 북쪽 캄덴락시장은 1970년대 배로 물건을 실어나르는 물량이 줄어들며 폐쇄 직전에 몰렸던 운하 주변거리이다. 이곳을 살린 건 당시 대학을 막 졸업한 두 젊은이의 아이디어였다. 15년간 이 지역을 임대한 뒤 낡은 창고를 젊은이들의 작업 스튜디오와 상점으로 싼 값에 빌려줬다. 신축의 경우도 예전 창고 스타일로만 짓도록 했다. 이들의 ‘실험’은 성공했다.


이곳에선 ‘첨단의 다국적 문화’를 즐길 수 있다. 시장에서 만난 사람들은 “구경만으로도 재밌다”고 입을 모은다. 고딕에서 펑키풍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패션 상품들이 넘쳐 난다. 시장 매니저인 앨런 존스는 “여전히 우리의 목표는 이윤보다 창의력 넘치는 사람들을 북돋우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루 40파운드를 내면 좌판대와 차양을 빌려준다.

런던 동쪽의 스피탈필즈시장은, 최근 재개발전문 대기업이 절반을 인수해 유리지붕을 씌우고, 빌딩도 새로 세웠다. 하지만 거리시장 만큼은 매일 임대료를 받는 이전 방식을 고수한다. 독특한 디자인의 핸드백을 팔고 있던 사샤 알렌은 “이곳을 찾아온 바이어와 연결돼 다른 가게에 도매로 물건도 공급한다”고 말했다.

런던의 거리시장들은 적은 자본으로 새로운 비즈니스를 일구려는 이들에겐 기회의 장소가 되고 있다.

런던/글·사진 김영희 기자 do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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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치단체-상인 대화로 공존 모색
올바른 소비자 의식도 유통질서 유지에 큰 구실 긴 역사를 가진 런던의 거리시장들도 최근 몇 년 사이에 대형 유통업체나 체인점들의 연이은 진입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포토벨로의 경우 값싼 대형유통업체인 테스코나, 스타벅스 같은 커피점들이 시장 한복판까지 들어왔다.

포토벨로 시장의 매니저인 니콜라스 카이직은 “2004년부터 지역사회에서 소상점을 살리자는 캠페인이 시작돼 구의회 차원에서 독립된 위원회를 구성했고 올 5월 보고서를 내놨다”고 말했다. ‘상업의 균형’이라는 제목의 이 보고서엔 정부와 지자체에 보내는 54개 권고안으로 구성되어 있다. 중앙매니저제를 신설하고, 소상점의 정의를 내리고 이들에 대한 대출을 확대하는 등의 내용을 담았다.

그럼에도 여전히 런던의 거리시장엔 정부 규제나 가이드라인 보다는, 상인과 지역주민 사이에 이뤄지는 협의나 축적된 전통에 따른 자율적인 유통질서가 두드러진다. 워낙 땅값이 비싼 탓에 테스코나 세인즈베리 같은 대형 유통업체들도 큰 규모의 매장은 시 외곽으로 돌리고, 시내에선 한국의 슈퍼마켓 크기의 매장들을 ‘로컬’이란 이름으로 운영한다. 카이직은 “테스코 바로 앞에서 청과상들은 여전히 수 십년간 이어져 온 대로 장사를 한다. 노점에서 파는 물건과 테스코에서 파는 물건들은 질도, 가격도 다르다. 소비자들의 선택에 달린 문제”라고 말했다. 정부의 정책 만큼이나 소비자들의 의식이 이런 질서에 큰 구실을 하는 셈이다.

하지만 이 ‘자연스런 공존’도 위험 상황에 놓였다. 최근 한 40대 부동산 재벌이 포토벨로시장의 상점 30여개를 사들여 임대료를 50%씩 한꺼번에 올린 게 언론의 도마에 올랐다. 역사 깊은 갤러리, 골동품 가게들이 쫓겨나고 그 자리에 기성복 브랜드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영국 일간 〈이브닝 스탠다드〉는 이를 두고 “포토벨로의 캐릭터였던 작은 상점들이 밀려나면서 배우와 작가들과 디자이너들이 넘치던 이 거리가 거대한 피자 체인으로 변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런던/ 김영희 기자 ⓒ 한겨레